한주환류 대금산조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자료 시리즈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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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명 :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자료시리즈 23 산조 • 음반번호 : KICP-060 • 제작/기획사 : 국립문화재연구소 • 녹음시기 : 불명 • 발매시기 : 2003 • 1. 대금산조-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 한주환 (15:56) • 글 : 이진원(한국고음반연구회) • 4 [산조] 악곡 설명 • 1) 한주환 대금산조 예술론 • 한주환은 박종기에게서 대금산조를 배워서 일가를 이루고 본인의 독특한 가락을 바탕으로 한주환류 대금산조를 완성한 대금의 명인이다. 이보형의 『산조』(문화재관리국)에 의하면 한주환은 전남 화순군 동복면 한천리 55번지에 서 부친 한보열의 여섯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한다. 화순면 남면 내리로 10세에 이사와 살았고 이후 서울, 전주 등지에서도 거주하였다. 부친 한보일이 소리뿐만아니라 태평소, 장고 등에 능했으므로 해서 한주환은 어려서 부터 태평소 등의 우리 악기를 손쉽게 접할 수 있었고 그 음악에 젖어들 수 있었다. • 윗 책에 기록된 이생강 명인의 증언에는 한주환이 한수동에게 정악을, 추산 전용선에게는 대금으로 삼현을 배웠 으며 30대 후반에 광주에서 박종기를 만나 산조를 배웠다고 전한다. 박종기와 마찬가지로 한주환의 생몰연대 또한 명확치가 않다. 이를 여러 증거로 추적한 이보형의 한주환의 생애에 의하면 1904년에 출생하여 1963년에 작고 한 것이 가장 신빙성있는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한주환이 박종기에게서 대금을 배웠다는 시점이 30세 라면 1934년이 되는데 박종기가 이때 당시 콜럼비아에서 3면의 산조음반을 내었고 유명해졌으므로 충분히 한주환 접하고 그 음악을 공부하고자 했을 수 있는 일이다. • 이 박종기 음악을 한주환이 대금을 박종기에게 공부하기 전에 이미 한수동에게서 정악을 배웠으므로 한수동의 장기인 대금시나위를 접했을 것이고 그 가락을 이미 습득했을 수도 있다. 한수동이 대금과 가야 금에 달통한 명인이었으므로 박종기의 산조를 접하기 전에 배운 한수동의 음악이 한주환의 대금 산조 깊숙히 녹아들었을 것이다. • 박종기의 산조와는 다른 한주환만의 독특한 산조에 대하여 이보형은 한주환의 생애'에서 박 종기에게서 학습하기 이전에 한수동이나 한숙구 등의 여러 명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임춘앵 단체 등 여러 단체를 수행할 때 여러 명창들과 교류를 하며 음악적 영역을 넓혀 나갔는데 특히 한일섭과의 교류가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박종기 대금산조와 한주환 대금산조가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 한주환이 대금산조를 처음 취입한 것은 1950년대이다. 이 음반이 Oasis 5630의 박주환 대금산조이다. 이 박주환은 한주환의 오기로 한주환의 제자 이생강명인에 의하면 이 음반을 취입하고 이름에 오자가 나 자 대금을 던져버리고 불지않았다고 한다. 그의 고집스러운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하겠지만 이 음반에서 들려 주는 한주환 대금산조는 이미 원숙의 경지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 Oasis 5630 大琴獨奏 진양조 大琴朴周煥 伴奏오아시스 國樂團 • Oasis 5630 大琴獨奏 중모리 大琴朴周煥 伴奏오아시스 國樂團 • 이 음반은 한주환 명인의 절묘한 대금 음색과 깔끔한 연주로 아주 뛰어난 명반이라 할 수 있다. 이 음반에서 한주 환 명인의 힘이 담긴 연주를 들으면 무더운 더위로 물러날 것 같은 시원함을 느낀다. 한주환 명인의 제자들이 지금 대금산조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만큼 이 음반의 연구가 40-60년대의 대금산조의 맥을 이어 주는 좋은 자료가 된 다. 이 음반외에 다른 한장의 유성기 음반을 취입했다고 하는데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 한주환이 1963년에 작고한 후, 1971년에 그의 대금산조가 12인치 장시간 음반(LP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이 음반 이 성음제작소 DG가34 胡笛(太平簫)과 大苓散調 大芩韓周煥 太平簫方泰根인데 약 20여분의 대금산조가 녹음되 어 있다. 이 한주환의 대금산조의 뒷면은 방태근의 태평소와 함께 시나위를 연주하는 것으로 한주환의 대금시나위 실력을 볼 수 있다. 이 20여분의 대금산조 음반외에도 한주환은 많은 대금산조 음악을 남겼다. 대부분 릴테이프로 녹음된 이 산조는 주로 문화재연구소 자료실, 국립국악원 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다. • 한주환의 제자 이생강은 한주환 명인 사후에 그와 같이 활동한 한일섭 명인에게 한주환의 대금 가락을 전해듣고 본인의 한주환류 대금산조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일섭이 한주환과 힘률사 공연을 다닐 때 기막힌 가락이 떠오르면 한주환에게 구음으로 일러주고 한주환은 이를 대금에 옮겨 같이 연주했다고 한다. • 한수동, 한숙구의 음악과 박종기의 음악, 한일섭의 가락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 바로 한주환이 연주했던 대금산 조이므로 한주환류는 박종기류이면서도 한주환 본인의 류로서 형성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주환류인 것이다. • 오늘날의 대금산조과 유사함을 논한다면 박종기 대금산조보다 한주환류의 대금산조가 더 유사하다. 그렇다 하더 라도 이생강이나 서용석의 대금산조가 한주환과 같은 분위기를 대금산조를 연주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한주환 본 인도 박종기에게서 대금산조를 배웠지만은 다른 분기기 및 가락의 산조를 연주한 것과 같다. • 한주환이 남긴 대금산조는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은 박종기 대금산조와는 다르게 중중모리가 들어간 것에서 다르다. 박종기가 증증모리를 연주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자신의 산조에 넣 은 것은 소리더듬으로 한주환이 박종기보다 먼저라고 생각된다. 한주환이 남긴 음악을 정리한 임재원은 한주환의 대금산조의 구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 장단/조의구성 • 진양조 : 우조, 계면조, 변청계면조, 계면조, 변청우조, 계면조 • 중모리 : 우조, 계면조 • 중모리 : 우조, 호걸제, 호걸제 • 자진모리 : 계면조, 호걸제, 계면조, 변청계면조, 계면조, 우조 • 위의 조의 구성을 살펴보면 자진모리를 제외하곤 모두 우조로 시작하고 있다. 끝은 중중모리와 자진모리는 호걸 제나 우조로 끝나지만 진양조와 중모리는 계면조로 끝난다. 변청계면조는 이생강의 대금산조의 생삼청이라고 하는 부분으로 대금의 기본청에 대한 4도 위의 엇청으로 신선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위의 한주환 대금산조 조의 구성에서 중중모리에 계면조가 없는 것에 대해 임재원은 DG가34 胡笛(太平簫) 大 岑散調 大韓周煥 太平方根 음반에는 계면조가 있다고 주에 부가하고 있으므로 한주환이 산조를 연주할 때 마다 고정된 가락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고 연주할 때마다 즉흥성을 가미하여 연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한주환의 자진모리가 박종기의 오케음반의 국거리 처음 부분(느린 자진모리)을 연주하고 있는 것에서 임재원은 한주환의 대금산조 중중모리도 박종기의 영향을 받았고 박종기의 산조가 전승되고 있는 증거가 된다고 하였다. 필 자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 • 시나위 더늠의 창시자 강백천의 대금산조는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의 구성을 하고 있다. 이 구성이 오늘날 대금산조의 기본틀이 되고 있다. 박종기가 중증모리장단으로 산조를 짜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중증모 리로 연주했다면 한주환 처럼 연주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한주환의 중중머리는 박종기의 국거리의 음악 진행과 흡사하다. • 한주환이 한참 대금연주자로 활동하고 있을 당시 대금 연주자들이 살길이란 굿판에서 대금을 불던가, 공연단체를 따라다니면서 연주하는 것 이상이 없었다. 박종기가 그러했듯이 한주환도 이러한 생활을 답습하게 된다. 박종기는 많은 유성기 음반을 취입하였으나 한주환은 음반 취입은 등한시 했고 창극단체를 따라다니며 연주했다. •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한주환은 여러 국극단을 따라다니며 음악을 연주했는데 1950년 4월 23일 공연된 여성국 극동호회의 햇님과 달님(제2화)에서 대금을 연주한 기록이 보인다. 당시의 국극단, 창극단 등의 공연 기록은 당시 신문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뿐 기록이 적다. 신문에 광고로 그 공연 사실이 확인되어도 연주진의 기록이 없을 때는 한주환의 연주 여부를 알 수 없다. • 1961년 시공관을 국립극장으로 인수하고 개수한 후 산하에 국립창극단이 창설되니 그 창설 개관 프로그램으로 1962년 3월 21일 대춘향전'을 공연하게 되었다. 이때 음악을 담당한 연주자들은 김재선, 한주환, 지영희, 김광식, 신쾌동, 성금연, 한갑득, 정철호 등으로 당시 최고의 진영으로 공연되었다. 이 무대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국립창극단에서는 1963년 봄에 심청전을 올렸는데 한주환이 1963년 작고했다면 1962년 국립창극단의 창설 연주 • 회를 마지막 무대로 생각할 수 있다. • 한주환은 박종기의 대금산조에 살을 붙여 오늘날 연주되는 대금산조의 산조의 틈을 확립한 대금산조의 중흥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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