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684특수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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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1월 17일 밤 북한 정찰국 소속 124 특수부대원 31명은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하여 남방한계선을 뚫고 침투하였습니다 이후 21일 밤 청와대를 습격하러 서울로 잠입하다 발각이 되어 군경과 교전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부대원 31명 중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북한으로 도주하였으며 유일하게 김신조만이 생포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극대노 하였으며 무장공비 침투 만행에 대한 보복을 지시하였습니다 이에 부응하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해병대 까치 부대를 포함하여 육군 선갑도 부대 해군 장봉도 부대 공군 실미도 부대를 창설하였습니다 이 중 실미도 특수부대는 1.21사태 때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 31명의 인원과 동일한 인원 숫자로 구성되었으며 언제든지 북한에 침투하여 김일성을 암살하는 특수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부대원들의 출신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었으며 호칭은 군인도 민간인도 아닌 공작원으로 불리어졌습니다 창설 당시 공군은 부대 특수 임무상 자살특공대의 개념을 가졌기에 인원 구성을 사형수나 무기수로 결성하려 하였으나 사망 시 유족에게 시신을 전해줘야 하는 법무부의 반대로 인하여 무산되자 선발 방향을 틀어 전국을 돌며 20대 위주의 신체 건강한 청년들을 모집하였습니다 실미도 부대의 정식 명칭은 공군 2325전대 소속 209파견대 이었으며 창설 날짜인 68년 4월을 일컬어 684부대라고 칭하였습니다 이후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혹독한 훈련이 연일 시작되었으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실미도 부대로 들어오기 전 약속한 것과 달리 다양한 혜택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그 와중에 부대 경비 예산의 착복과 횡령이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봉급은 끊겨졌고 쌀밥 고깃국과 함께 나왔던 주 부식은 형편없이 떨어져 소금국과 보리밥 밀밥으로 끼니를 채워야만 하였으며 그마저도 양이 적어 배고픔에 굶주리며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고된 생활 속에서 부대원들은 하루빨리 북한으로 침투하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드디어 1969년 북한으로의 침투 임무를 부여받고 백령도에서 한달여간 대기하고 있었으나 상부의 방침이 바뀌어 끝내 계획이 무산되었으며 또다시 실미도로 복귀하여 지옥훈련과 굶주림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또한 그해 김형욱 중정부장이 권력에서 밀려나며 자리에서 물러나자 실미도 부대의 관리는 그전에 비해 현저히 부실해졌으며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려 남북이 화해 분위기로 접어들자 북한으로의 침투 임무는 더욱더 불투명해져 갔습니다 이러한 극심한 절망감 속에서 대원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으며 사건 하루 전인 8월 22일 밤 2박 3일간의 휴가를 보내고 복귀한 10여 명의 기간병들은 준비해 온 술과 함께 회식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24명의 대원들은 아무도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다음날 서울로 향하기로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1971년 8월 23일 참을 만큼 참다 지친 684공작원들은 운명의 날을 마주하였고 모두 작심하며 탈출 행동을 개시하여 교관을 포함 기간병 12명을 사살하였으며 6명은 바다로 도망치다 희생되었습니다 이후 무기고에 있던 소총과 실탄 수류탄 등을 탈취하여 섬을 빠져나와 평양 주석궁이 아닌 대통령을 만나서 담판을 짓기 위하여 서울 청와대로 향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훈련병 2명이 사망하였으며 이후 22명이 배를 타고 인천 옥련동 해안가에 상륙하자 해안 초소병이 발견하였으나 해상침투훈련 중이라고 따돌린 후 인천 시내로 가는 시내버스를 탈취하여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나 해안 초소병의 보고를 받고 출동한 군 소대 병력이 저지하자 교전을 치른 후 저지선을 뚫었으나 석바위를 지날 즘 버스 뒤 타이어가 터져있어 더 이상 가지 못하자 하차하여 다시 수원 인천 간 시외버스를 탈취하여 이동하였습니다 이후 서울로 진입을 하였으나 대방동에 이르러 군경 합동 저지선에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또다시 교전은 시작되었으며 이윽고 이동하던 버스가 유한양행 건물 앞 가로수에 들이받고 멈춰 섰습니다 이때의 충격으로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고 손에 쥐고 있던 4명 중 한 명의 수류탄이 바닥에 떨어져 폭발되었으며 곧이어 이곳에서 부대원들은 상황이 암울해지는 것을 느끼며 돌파할 가능성이 없어지자 결국 대원 모두 수류탄으로 자폭하였으며 이들 중 4명만이 부상당한 체로 살아남았으나 치료 후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이후 국회 특별 조사위원회가 발족이 되어 살아남은 대원들을 증인으로 출석시켰으나 그들이 이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던 자신들의 억울한 진실을 토로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했습니다 그 이면에는 진상조사가 시작되기 전 군 관계자들이 찾아와 대원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실을 증언하게 되면 모두가 사형당할 것이며 군 보안상 증언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사형을 면하게 해줄 것이며 차후 월남전에 보내주겠다며 국가가 약속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애초부터 지킬 생각이 없는 것이었으며 이듬해 1972년 3월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이들이 남긴 유원은 살아생전 국가에 대하여 아무 말도 못 하고 국가를 위해 싸우지도 못하고 국민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는 게 억울하며 그토록 바라던 김일성을 죽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하여 부대원 중 훈련 기간 사망한 7명을 포함하여 31명 전 대원이 비운의 운명으로 인생의 막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 #김형욱#박정희#실미도부대 • 후원계좌 - 우리은행 1002-262-801195 (배O호) • 참고문헌 • 노태우 회고록 국가 민주화 나의 운명 전환기의 대전략 (2011년 10월09일) • 정승화 자서전 (2002년 09월25일) • 이건영 회고록 패자의 승리 (1996년 05월1일) • 장태완 회고록 쿠데타와 나 (1993년 9월1일) • 류병현 회고록 (2013년) • 박준병 회고록 군인의 길 정치인의 길 (2012년 8월6일) • 권정달 회고록 5共 비화 • 김계원 자서전 the Father 하나님의 은혜 (2012년 11월15일) • 신현확 회고록 신현확의 증언 (2017년 09월20일) • 김대중 자서전 (2010년 07월30일) •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위를 위한 나의 투쟁 (2001년 2월28일) • 김종필 증언록 (2016년 3월4일) • 박철언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 5공 6공 3김시대의 정치비사 (2001년 2월28일) • • KOREA HISTORY 인기 동영상 • 대망의 장군이 된 전두환 준장 • https://www.youtube.com/watch?v=QRfP7... • 월남전에 참전하는 전두환 대령 • https://www.youtube.com/watch?v=kPjuE... • 12.12사태 진종채 2군사령관 이건영 3군사령관 통화 2 (12월12일 23시03분) • • 12.12사태 진종채 2군사령관 이건영 3군사령관 통화 2 (1... • Music: https://www.bensound.com/royalty-free... • 구독과 좋아요는 KOREA HISTORY 채널에 큰 힘이 되어줍니다 • 여러분의 건전하고 유익하며 즐거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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